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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31일 월요일

미쿡 RAP GOD EMINEM 이 있다면 한국엔 rap genius 산이가 그리고 RAP MONSTER 이 있다~!!
















대한민국의 랩퍼 산이 그리고 랩 몬스터와

미국랩퍼인 백인의 힙합 자부심인 에미넴...

에미넴이 좀더 실력도 있고 플로우 및 필링도 좋지만, 산이 나 랩 몬스터도

시간이 흐른뒤에 에미넴은 미국을 대표하는가수가 되었듯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랩퍼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팝의 2대 디바 셀린 디온



팝 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아티스트 중 한 명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과 함께 세계 3대 디바로 불리는 전설.
마돈나 다음으로 많은 앨범을 판매한 여성 가수

셀린 디온 (Celine Dion | Celine Marie Claudette Dion) 가수
출생
1968년 3월 30일, 캐나다
신체
171cm
가족
배우자 르네 앙젤릴
데뷔
1990년 1집 앨범 [Unison]
수상
2012년 밤비 미디어 어워즈 연예부문상
2008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캐나다의 가수 겸 배우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다른 두 명과 달리 인지도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이 항목도 3대 디바 중 가장 늦게 작성되었다. 이유는 알려진 대로 뜬 시기가 가장 늦었으며 더불어 음반도 내느라 빌보드에 집중하지도 않았고, 실제 디옹이 슈퍼스타로 떠오른 3집 활동 시기는 3대 디바 어쩌고 할 때인 90년대 초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보다 늦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쪽 인기는 타 디바들에 비해 엄청나게 높다.프랑스어가 되니까 흔히 머라이어 캐리보다 먼저 데뷔했음에도 셋 중 가장 막내라고 하는데 뜬 시기는 머라이어보다 시기가 늦기 때문이다.(영어권 한정). 영국에서 싱글을 2백만 장 이상 판매한 기록을 보유한 여성 아티스트이며, 1억 6천만 장의 앨범을 판매, 앨범과 싱글을 합친 판매량은 2억 장이 넘는다.
2014년 들어서 무기한 활동중단 소식을 밝혔다. 그러다 2015년 다시 복귀를 선언하고 라스베가스 쇼를 재개하였다.
프랑스어를 주로 쓰는 캐나다 퀘벡 주에서 태어나 12살 때 'Ce n'etait qu'un reve (그것은 단지 꿈이었을 뿐)'이라는 곡을 작곡하고 녹음했다. 셀린의 오빠는 이 곡의 데모 테이프를 '르네 앙젤릴'이라는 매니저에게 보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자 자동 응답기에 "당신은 그 곡을 들어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들어봤다면 연락을 안 했을 리가 없으니까요."라고 남겼다. 오빠의 패기 데모 테이프를 들은 후 르네는 그 즉시 셀린에게 연락을 했고, 자신의 집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셀린의 앨범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 때 시작된 인연은 이후 부부의 인연까지 이어진다. 26살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
프랑스어권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으면서 1982년 'Tellement J'Ai d'amour pour Toi'라는 곡으로 일본 야마하 국제 콘테스트에서 금메달을, 'Ne partez pas sans moi'란 곡으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그랑프리를 따기도 했다. 이 노래는 본인이 노래를 했다. 작사는 그리스인, 작곡은 스위스인이 했고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ESC) 1998에서 스위스 국가 자격으로 출전했다. #. 여기 우승에 얽힌 비화가 있다. 마지막 판정 직전까지 2위였던 스위스가 1점 차이로 영국을 역전하며 우승했다. ESC 1988 판정은 각 나라마다 10국가에 1-12점씩을 주었는데 마지막 유고슬라비아 심판에게 6점을 받아서 최종 137점을 얻은 스위스의 셀린 팀이 우울해하고 아직 점수 호명이 안된 영국이 좋아라하면서 영국의 우승이 확정되나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영국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면서 결국 디옹이 우승을 거두었다. 호명 직후 셀린의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유럽 전역에만 국한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셀린이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보고선 '나도 저 사람처럼 수퍼스타가 되고 싶다.'고 말하자 르네가 영어로 앨범을 녹음해야 가능할거라고 충고했다. 그때부터 셀린은 가정 교사를 두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1990년 영어로 된 데뷔앨범 'Unison'을 발표했다. 아하와 같은 가수의 프로듀서였떤 크리스토퍼 넬을 주축으로 제작된 이 앨범은 당시 유행하던 댄스곡과 락발라드가 적절히 배합된 앨범이었다. 첫 싱글 '(If There Was) Any Other Way'는 빌보드 싱글차트 35위에 올랐지만 셀린의 이름을 제대로 알린 것은 다른 발라드 곡 'Where Does My Heart Beat Now' 였다. 빌보드 싱글차트 4위까지 오른 곡으로 빌보드 연말차트 37위에 랭크되었다. 이곡은 폭팔적으로 터져나가는 발성의 락발라드로 그녀는 가창력을 인정받으며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와 함께 디바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녀의 가창력일뿐, 상업적인 측면에서 이때까지는 저 둘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디옹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Where Does My Heart Beat Now'는 알아도 누가 그 노래를 불렀는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노래가 아닌 자기 이름을 알린 것은 'Beauty And The Beast'부터 였다고 말했다. 그래도 앨범이 미국에서만 100만 장 이상이 팔려 영어권 데뷔에 성공했다.
이후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주제가를 피보 브라이슨과 듀엣으로 부르고 이라크전에 참전한 미군들을 격려하는 곡인 'Voices That Care'에서도 여성 솔로파트를 맡는 등 인기가 날로 더욱 높아져 갔다. 여세를 몰아 발표한 2집에서도 'If You Asked Me To', 'Nothing Broken But My Heart', 'Love Can Move Mountains' 등의 히트곡이 터져나왔다. 이곡들은 셀린과 많은 작업을 한 여류 히트메이커 다이안 워렌의 곡들로 모두 빌보드 40위권에 안착했다. 또한 프린스가 작곡해준 with this tear는 그녀의 가창력이 폭팔력 뿐 아니라 섬세함이 더해짐을 증명해준다. 이 앨범에서는 멜로디 메이커 월터를 주축으로 만든 앨범으로 1집보다 훨씬 감성적인 멜로디를 선사했다. 무엇보다 'Beauty And The Beast'가 아카데미에서 주제가상을 받은 것이 셀린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데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셀린을 세계적인 수퍼스타이자 디바로 만들어 준 앨범은 3집 'The Colour Of My Love'였다. 1집에 참여했던 보디가드를 통해 한창 주가를 올리던 히트맨 데이빗 포스터를 주축으로 한 앨범으로 첫 싱글 'The Power Of Love'는 그녀의 첫 빌보드 싱글차트 1위 곡이 되었고, 1  그 밖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주제가 'When I Fall In Love'을 통해 다시 영화 듀엣곡으로 중박정도 사랑을 받고 misled 같은 곡으론 댄스에도 도전했다. 특히 'Think Twice' (영국 차트 1위)같은 곡은 미국에서는 망했지만 영국에서는 그녀의 대박 히트곡이 되었다. 전세계적으로 1,8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국내에서는 'The Power Of Love'는 우리나라에서 TV는 사랑을 싣고의 주제가로 쓰이기도 해서 인지도가 높다.
아카데미 주제가 상을 탈때의 공연. 디옹이 차고있는 목걸이는 영화에 나오는 그 보석 맞다.
이런 활발한 영어 앨범 활동중에도 그녀는 꾸준히 프랑스어 앨범을 발매했는데 특히 1995년 발매된 D'eux는 프랑스어 앨범 역대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다. 프랑스의 국민가수 장자크 골드만이 메인프로듀싱한 이 앨범은 프랑스 내에서만 4412100장 팔렸으며 전세계적으로 100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앨범의 인기가 워낙 대단해서 프랑스에선 44주간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녀의 다음 앨범인 Falling into you 역시 이 앨범에 밀려 2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4집 'Falling Into You'는 미국에서만 1천만 장 이상이 팔렸으며 전세계적으로는 3,2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Because You Loved Me', 'It's All Coming Back To Me Now' 그리고 국내에서 오빠 만세로 잘 알려진 'All By Myself' 등이 히트했다. 디온의 커리어에서 가장 성공한 두 앨범 중 하나인데, 5집이 'My Heart Will Go On'에 집중된 인기라고 한다면, 4집은 'Because You Loved Me'가 대표적이긴 하지만 비교적 고루고루 인기를 얻었다. 3집 때까지 머라이어 캐리에 밀려 콩라인이던 셀린 디옹은 이 앨범으로 소니애서 가장 중요한 가수로 위치가 격상되었다. 'Because You Loved Me'는 영화 '업클로스 앤 퍼스널 (Up Close And Personal)'에 삽입되어 메가 히트를 쳤고 빌보드에서 6주간 1위를 했으며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서 거의 1년 동안 랭크되어 있음은 물론, 그래미 어워드에서 'Album Of The Year'를 수상했다. 당연히 투어도 대박을 쳤으며 첫 내한 공연도 이때 이루어졌다.
다음 해 발표한 5집 'Let's Talk About'도 천만장 이상이 팔렸으며 전세계적으로 3,1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특히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인 'My Heart Will Go On'은 셀린 히트곡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무렵 그녀의 앨범이 1초당 1장씩 팔려나간다는 통계 자료까지 나왔으니 말 다한 것이다. 게다가 타이타닉의 OST 역시 3천만장이 넘게 팔렸는데, 이 앨범은 'My Heart Will Go On' 이외의 트랙이 전부 클래식 음악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한 곡의 힘이 컸다. 사실 본 앨범에서도 완성도와는 별개로 싱글은 'My Heart Will Go On'을 제외하면 별로 히트한 싱글이 없었다. 게다가 곡의 싱글마저 미국에서 한정판으로 풀어버리는 바람에 순식간에 매진이 되었다. 소니의 대표적인 병크 중 하나인 듯. 그런고로 그 해에는 'My Heart Will Go On'이 수록된 5집과 타이타닉 OST 양 쪽 모두 3천만장이 넘게 판매된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기록. 보통 2~3년 틈을 두고 앨범을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인 팝계에서 다작을 하면서도 이렇게 메가 히트를 시켜버리니 그야말로 리즈 시절을 달렸다.
이후 크리스마스 앨범과 베스트 앨범을 발표했다. R. 켈리와의 듀엣 'I'm Your Angel'이 빌보드 차트 1위를 하는 등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캐롤 음반들 중 하나이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로 유명한 머라이어 캐리의 캐롤 음반보다도 미국 내 판매량이 근소하게 앞섰으나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머라이어의 앨범이 더 잘팔려서 지금은 추월당했다.
이 당시 그녀의 베스트 앨범 'All The Way'를 발매하는데 2,400만 장이라는 베스트앨범으로선 믿기 힘든 판매량을 기록한다. 다만 여기엔 신곡 7곡이 포함되어 있었다. 90년대 중반 이후의 그녀의 네 장의 앨범(4,5,캐롤음반,베스트 앨범)은 96~99년 4년간 1억장을 돌파했고,여기에 타이타닉 OST는 포함조차 되지 않았으니,90년대 후반은 그야 말로 셀린 디옹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어느날 남편 르네가 후두암에 걸려 활동을 중단하면서 남편 병간호에 나섰다. 다행히 르네의 병은 호전을 보였으며 시험관 시술로 아들까지 얻는 겹경사를 맞았다. 개인 새생활이 안정을 겪으면서 6집 'A New Day Has Come' (1200만장 그해 판매순위 2위.) 와 7집 'One Heart' (600만 장)가 연이어 발매되었지만 예전만한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라이베이거스에서 장기 공연을 하면서 여전한 가창력을 발휘했다. 그 해에 전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이 판 앨범 (1위는 에이브릴 라빈, 두 앨범간 판매량 차이도 얼마 없었다.) 을 중박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나, 그 전 앨범들에서 워낙 압도적인 판매량을 보인 것과 대비되는 점, 또 6집에서는 전작들과는 달리 차트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싱글이 없었다는 점이 상대적인 저평가를 받는 이유인듯.
앨범도 앨범이지만 라이브 활동이 인상적인 디바로도 꼽힌다. 2007~09년의 'Taking Chances Tour' 는 역대 라이브 투어 중 11위(여성 중 3위. 그 위의 2개는 어느 여왕님)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아예 라스베이거스에 공연장을 새로 지어 레지던스 쇼 형식의 공연을 하고 있다. 2003~07년의 'A New Day' 에 이어 2011년부터는 'Celine' 을 진행 중이다. 2019년(!)까지 계약된 상태다. 셀린디옹의 콘서트 티켓은 2000~2009년에만 7.2억 달러,환율 1000원만 잡아도 7200억이 넘게 팔렸다. 또한 2006년쯤에 셀린 디옹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는 말이 나왔고 그것을 라스베이거스의 건조한 공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아예 공연 장소에 가습기를 설치했다.
프랑스어와 영어 양쪽으로 나뉘어진 음악 활동으로 인해 라이브 투어 또한 세트리스트를 영어권 대상과 프랑스어권 대상으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다. 프랑스어권 세트리스트가 영어/프랑스어 곡이 대략 반반 섞인 구성인 데 비해 영어권 세트리스트는 한두 개 정도의 프랑스어 곡만이 포함되는 차이를 보인다. 이유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역대 프랑스어 싱글 중 유일하게 영국 차트에 들었기 때문인 듯. 늘 끼는 곡은 'Pour que tu m'aimes encore'. 2008년 서울 공연 당시 셀린의 코멘트는 '한 곡 정도는 프랑스어 곡을 불러야 해요' 였고 거의 당연하게도(!) 관객의 호응은 공연 전체에서 최하를 달렸다.

제 3대 디바 머라이어 캐리를 소개합니다~

출생일:
1970년 3월 27일,
출생지:미국
가수:  머라이어 캐리
장르:  팝
세부장르:  알앤비
발매일  1990년 6월 12일
제작사 : 컬럼비아(Columbia)

팝 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R&B,힙합,팝 세 장르를 하나로 만든 가수
90년대 미국 최고 인기 가수
원조 아메리칸 스윗하트
Songbird Supreme
역대 여가수 판매량 2위 , 역대 솔로가수 판매량 5위 , 역대 전체가수 판매량 8위
90년대를 평정했던 최고의 가수.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 2000년대에 화려하게 부활해 또 다시 팝계를 평정한 여가수.여가수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다는 것을 보았을 때 이만큼 세계적으로 성공한 여가수는 5손가락 안에 꼽는다. MTV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목소리 1위에 선정되었다. 각종 매체에서 역대 전세계 여가수 가창력 순위를 따지면 5위안에 무조건 등장하는 여인이다.
수 많은 여가수들의 롤모델이며 그녀때문에 가수가 된 여가수들도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밑에서 설명하는 머라이어 키즈가 그 예이다.
휘트니 휴스턴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으며 휘트니와 함께 가장 많은 가수들에게 영향을 준 여가수 1,2위를 다툰다.
전세계 1억 7천만 이상의 앨범 판매고와 2억 장이상의 레코드 판매(앨범+싱글)를 가지고 있으며 여가수로는 마돈나와 셀린 디온에 이어 3위, 미국에서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에 이어 앨범 판매고 여가수 2위.전세계 통틀어 음반판매(앨범+싱글) 순위 8위에 빛난다. 30세에 이미 빌보드 Hot 100 차트 넘버원을 15곡이나 만들어냈으며 38세까지 18곡을 만들어내면서 비틀즈에 이어 공동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팝(Dreamlover,Fantasy), 알앤비(We Belong Together, Butterfly), 가스펠(Fly Like A Bird, Make It Happen, My Saving Grace), 소울, 힙합(It's Like That, Migrate 등), 발라드(All I Ever Wanted), 어덜트 컨템포러리, 댄스(Obsessed), 라틴(My All, After Tonight), 클럽(Loverboy), 락(Bringin'On The Heartbreak), 컨트리(Make It Look Good), 레게(Cruise Control) 오페라 등 갖가지 장르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형 가수.
Hot 100 18곡의 1위뿐 아니라 그 하위 부류인 알앤비/힙합 차트에서는 10곡의 넘버원, 팝 차트에서는 6곡, 댄스/클럽 차트에서는 17곡,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서까지 7곡의 넘버원을 뽑아내며 빌보드의 메인 차트들 중 록 차트와 컨트리 차트를 제외한 모든 차트에서 1위곡을 뽑아냈다. 특히 그녀의 곡 〈One Sweet Day〉는 Hot100차트 16주간 1위를 차지해 최장기 1위기록을 세웠고 현재까지 19년 넘게 깨지지 않는 기록이 되었으며 그녀의 곡 또한 14주 1위로 이 부문 공동 2위를 기록중이다.
90년대 빌보드10년결산 1위곡은 이고 00년대 빌보드10년결산 1위곡은 이며 모두 머라이어의 곡이다.
그녀의 캐롤곡〈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때가 되면 빌보드 Hot100에 재진입을 하는 기염을 토한다. 또한 저 전설의 캐롤은 피지컬 판매량 1600만장 디지털 판매량 350만건으로 약 1800만장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다. 이는 피지컬로는 전체 10위 피지컬+디지털로는 전체 8위이다.

미국뿐만이 아닌 아시아에서도 인기 있는 가수로서 유럽에서 인기가 비교적 약하다는 점을 아시아 지역의 엄청난 인기로 보완한다. 그도 그럴것이 아시아 지역은 유럽 지역보다 훨씬 더 영/미권 팝가수의 진출과 성공이 어렵기 때문이다. 캐럴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흘러나오고 있으며 곡 〈Hero〉는 영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머라이어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한 여자 가수이다. 2위가 S.E.S.
전성기시절 일본인기는 엄청나다. 철저히 내수시장인 일본음반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팝가수이자 최고의 팝가수.그녀의 앨범 《#1's》는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해외앨범이며 3위,4위,8위에 그녀의 앨범들이 포진되어있다.게다가 일본가수들도 하기힘들다는 도쿄돔공연을 《Daydream》시절
3일,《Butterfly》시절 4일, 《Rainbow》시절 2일분 모두 매진시키면서 총 9회분의 공연을 다 매진시켰다. 매진시킨 관석수를 합쳐보면 45만석이다. 오리콘 위클리 앨범차트 1위가 6개있으며 일본에서만 1700만장 판매고로 일본내 해외가수 판매량 1위이다.
음역대가 0옥타브 레#(Eb2)부터 5옥타브 솔#(G#7)까지 총 5옥타브 3노트이다. Eb2 (0옥타브 레#)는 〈You Had A Chance〉에서 나오고 근데 당최 어디있다는건지... G#7 (5옥타브 솔#)은 1991년 〈Emotions〉 라이브에서 한번 나온 후 종적을 감췄다가 23년 후인 2014년 〈Heavenly (No Ways Tired / Can't Give Up Now)〉에서 한 번 더 출연한다. 자세한 기록은 http://youtu.be/d_5mIaJin3g 참고. 2014년 새로운 앨범에서 갱신되었다. 이 정도의 음역대를 가진 메이저 가수들은 전세계를 통틀어도 머라이어밖에 없다.
최고음 G#7까지 올라가는 팝 가수나 소프라노들은 아주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종종 있긴 한데 핵심은 최저음이 Eb2라는 것. 웬만한 남자가 내는 중저음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머라이어는 콘트랄토인 셈. 중음도 안비는 데다가 완벽한 발성으로 구사한다는 것이 더 놀라운 점이다. Hot 100 넘버원 18곡 중 잭슨 5의 〈I'll Be There〉 리메이크를 제외한 17곡 모두를 본인이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 머라이어의 노래들은 〈Hero〉같은 몇몇 곡들을 제외하면 난이도가 미친 듯이 높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히어로의 곡 난이도가 낮다고 보기는 힘들다. 중간 정도. 쉬운 노래를 꼽자면 〈I Still Believe〉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마저도 후반부에 4옥타브 가성이 있지만 진성 부분은 무난한 편. 팬들이 꼽는 미친 난이도 노래는 〈Butterfly〉, 〈Outside〉, 〈Lead the Way〉, 〈Fly Like a Bird〉, 〈Anytime You Need a Friend〉, 〈There's Got to Be a Way〉, 〈Whenever you call〉, 등 이다.
게다가 엄청난 몸매의 소유자로 지금은 애엄마이기도 하고 40대의 나이라서 살이 쪘지만 다이어트를 하면 엄청난 몸매가 드러난다. 그녀의 다리는 1조원에 달하는 보험에 가입되어있다.

팝의 디바 휘트니 휴스턴...

출생-사망:  1963.8.9 ~ 2012.2.11
본명:  휘트니 엘리자베스 휴스턴(Whitney Elizabeth Houston)
국적:  미국
활동분야:  대중음악, 영화
출생지: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Newark)


팝의 여신은1963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어났다. 소울·가스펠 가수인 어머니 시시 휴스턴(Cissy Houston)과 알앤비 가수인 숙모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10대 시절에는 교회 성가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국 알앤비·디스코 그룹 마이클 제이거 밴드(The Michael Zager Band)의 <라이프즈 어 파티(Life's A Party)>(1978)에 백 보컬로 참여하며 음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팝 밴드 머티리얼(Material)의 <메모리스(Memories)>(1982), 미국 싱어송라이터 폴 자바라(Paul Jabara)의 <이터널 러브(Eternal Love)>(1983) 등에 보컬로 참여하며 경력을 쌓았다.
1984년 미국 시트콤 《김미 어 브레이크!(Gimme A Break!)》의 ‘케이티스 칼리지(Katie's College)’ 편에 출연하며 배우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드라마와 시트콤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1985년 데뷔앨범 《휘트니 휴스턴》을 발표했다.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한 <세이빙 올 마이 러브 포 유(Saving All My Love For You)>(1985),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Greatest Love Of All)>(1986), <아이 워너 댄스 위드 섬바디 (후 러브스 미)(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1987), <디든트 위 올모스트 해브 잇 올(Didn't We Almost Have It All)>(1987) 등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또한 1990년대에는 가수 활동과 연기 활동을 병행했다. 믹 잭슨(Mick Jackson) 감독의 1992년 영화 《보디가드》에서 주연을 맡으며 영화배우로 데뷔했고, 포레스트 휘테커(Forest Whitaker) 감독의 1995년 영화 《사랑을 기다리며(Waiting To Exhale)》, 페니 마셜(Penny Marshall) 감독의 1996년 영화 《프리처스 와이프(The Preacher's Wife)》 등에 출연하며 연기자 경력을 쌓았다. 《보디가드》의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I Will Always Love You)>(1992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와 <아임 에브리 우먼(I'm Every Woman)>(1993년 4위), 《사랑을 기다리며》의 <엑스헤일 (슙 슙)(Exhale (Shoop Shoop))>(1995년 1위), 《프리처스 와이프》의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1997년 15위) 등 사운드트랙의 음악으로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 미국 알앤비 가수 바비 브라운(Bobby Brown)과 결혼했지만,
(영화 보디가드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했다고 하네요...)
2000년대 들어 남편과 불화를 겪고 있으며 마약에 중독됐다는 소문이 계속해서 나왔고. 2002년 앨범 《저스트 휘트니…(Just Whitney...)》로 활동을 지속했지만 전작들에 비해 상업적 성과는 저조했다. 2007년 바비 브라운과 이혼했고 비슷한 시기 그동안 부인해 왔던 마약 복용에 대해 시인했다. 2009년 《아이 룩 투 유(I Look To You)》를 발표하며 재기했으나 2012년 베벌리힐스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ㅠㅠ
팝의 여신인 휘트니 휴스턴은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수많은 후배 가수의 본보기가 되었다. 미국 알앤비 가수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캐나다 가수 셀린 디옹(Celine Dion)과 함께 ‘1990년대 최고의 여성 보컬 3인’으로 여겨진다. 알앤비, 어덜트 컨템퍼러리, 댄스음악, 가스펠 등 다양한 스타일을 소화함으로써 팝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았다. 매체로부터 ‘퍼스트레이디 오브 알앤비(First Lady Of R&B)’, ‘퀸 오브 팝 뮤직(Queen Of Pop Music)’ 등의 칭호를 들었다.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7회 연속 1위 기록을 보유한 최초의 가수이기도 하다.
대표앨범으로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기록한 《휘트니 휴스턴》(1985)과 《휘트니》(1987) 등이 있다. 대표곡으로 <세이빙 올 마이 러브 포 유>, 미국 재즈·알앤비 가수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그레이티스트 러브 오브 올>, <디든트 위 올모스트 해브 잇 올>, 미국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Dolly Parton)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아이 윌 올웨이즈 러브 유>, 미국 싱어송라이터 샤카 칸(Chaka Khan)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아임 에브리 우먼> 등이 있습니다.


아래 목록은 휘트니 휴스턴의 앨범 목록입니다.참고해주세요,
1985년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1987년 《휘트니(Whitney)》
1990년 《아임 유어 베이비 투나이트(I'm Your Baby Tonight)》
1998년 《마이 러브 이즈 유어 러브(My Love Is Your Love)》
2002년 《저스트 휘트니…(Just Whitney...)》
2009년 《아이 룩 투 유(I Look To You)》
[디스코그래피: 사운드트랙 앨범]
1996년 《더 프리처스 와이프(The Preacher's Wife)》
[필모그래피: 영화]
1992년 《보디가드(The Bodyguard)》 레이철 머론 역
1995년 《사랑을 기다리며(Waiting To Exhale)》 사바나 잭슨 역
1996년 《프리처스 와이프(The Preacher's Wife)》 줄리아 빅스 역
1997년 《신데렐라(Cinderella)》 요정 대모 역
1997년 《스크래치 더 서피스(Scratch The Surface)》 본인 역
2012년 《스파클(Sparkle)》 엠마 역


휘트니 간단 요약,
11세 때 미국 뉴저지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시작한 휘트니 휴스턴은 1985년 발표한 데뷔 음반이 2,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미국에서 다이아몬드 앨범(1,000만 장 이상 판매를 기록한 앨범)에 오름과 동시에 역대 여성 가수의 솔로 데뷔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됐다. 특히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출연한 영화 <보디가드>의 주제가인 <아윌 올웨이즈 러브 유(I will always love you)>가 담긴 앨범은 4,200만 장이 팔렸으며, 이 곡은 당시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4주간 1위를 차지해 당시 역대 최장기간 1위 기록을 세웠다.
휴스턴은 1980~90년대 흑인 특유의 소울(soul : 영혼을 울린다는 의미의 창법)이 가득하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 정교한 감정처리 등으로 팝계를 장악했다. 디바(diva)라는 칭호를 가장 먼저 얻었으며, 1990년대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과 함께 3대 디바로 불렸으나, 가창력과 인기 등 모든 면에서 한 수 위라는 평을 받았다. 누적 음반판매량 1억 7,000만 장, 그래미상 6회, 빌보드 뮤직어워드 16회, 아메리칸 뮤직어워드 22회 등 총 415번의 상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여가수로 기네스북에 오른 바 있다.
하지만 휴스턴은 1992년 가수 바비 브라운과 결혼한 이후 불행한 결혼 생활과 약물 중독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2007년 브라운과 이혼한 뒤 제작자 데이비스와 2009년 <아이 룩 투 유(I look to you)>를 발매했지만, 약물을 끊지 못해 완벽한 재기에는 실패했다. 휴스턴은 2012년 2월 1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버리 힐스의 베버리힐튼 호텔에서 향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약물 중독으로 인한 익사로 밝혀졌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출생-사망:  1958.8.29 ~ 2009.6.25
본명:  마이클 조지프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별칭:  마이클 조 잭슨(Michael Joe Jackson), 킹 오브 팝(King Of Pop), 엠제이(MJ)
국적:  미국
활동분야:  대중음악, 영화
출생지: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Gary)


1958~2009
'팝의 황제(King of Pop)'로 불리는 미국의 전설적인 팝스타인 마이클 잭슨입니다.
마이클 잭슨의 본명은 마이클 요셉 잭슨(Michael Joseph Jackson)으로,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는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어머니와 팔콘스(The Falcons)라는 그룹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경험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음악적인 영향을 받고 자라났으며,
마이클 잭슨은 1963년 5세 때부터 형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Jackson 5)'란 그룹으로 활동하며 메인보컬을 맡았는데. '잭슨 파이브'는 1968년 모타운(Motown) 레코드사와 계약한 후 1969년 최초의 싱글 음반 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첫 번째 앨범 의 수록곡 , , 까지 4곡 모두 전미 빌보드차트 1위를 기록했다. 1971년부터 솔로로 데뷔한 마이클 잭슨은 14세였던 1972년 발표한 으로 다시 차트 1위를 차지하게되었습니다.
1975년 모타운에서 독립한 마이클 잭슨은 프로듀서 퀸시 존스(Quincy Jones)를 만난 이후 1979년 솔로 앨범 을 발표하며 당시 150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 앨범으로 1980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R&B 가수상을 수상했다.
1982년 발표된 앨범 <스릴러(Thriller)>는 전 세계에서 1억 4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최다판매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수록곡 , , , 등 7곡이 빌보드 10위 안에 들었으며, 37주 동안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랐다. 마이클 잭슨은 이 앨범으로 198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프로듀서상, 올해의 앨범상, 최우수 R&B 보컬상, 최우수 록 보컬상을 비롯해 총 8개 부문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특히 은 1983년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최초 공개된 안무 문워크(Moonwalk)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달 표면을 유영하듯 미끄러진다는 뜻의 문워크는 마이클 잭슨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합니다
또한 1985년의 싱글 음반 는 아프리카의 기아로 인한 난민 구호를 위해서 그가 작곡한 곡으로, 약 2000만 장 이상이 판매돼 1986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했다. 한편 1984년의 투어공연을 자선콘서트로 개최해 당시 역대 최고의 수익을 올리며, 자선단체에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기도 하였고,
1987년 발표된 앨범 , , , , 5곡이 빌보드차트 1위를 달성하며 약 3000만 장이 판매되었고,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가 제작한 의 뮤직비디오로 화제가 되었다. 수록곡 의 안무 린댄스(Lean Dance) 또한 유명한데, 발을 무대에 고정시키고 30도의 각도로 기울어진 몸을 지탱하는 린댄스를 위해 그가 직접 개발한 특수신발은 특허로 등록되어 있다. 이후 앨범의 전 세계 투어공연이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열린 가운데,
1991년의 는 7주간 빌보드차트 1위를 차지한 ,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히트곡으로 선정된 , 세계평화를 노래한 등이 수록된 앨범으로 약 3200만 장이 판매되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전 세계에서 앨범 투어공연이 연바가 있는 마이클 잭슨
1995년에는 베스트앨범 를 통해 히트곡과 신곡을 2CD로 발매했다. 여동생 자넷 잭슨(Janet Jackson)과의 듀엣곡인 은 빌보드 싱글차트 5위에 올랐고, 199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받았다. 당시 뮤직비디오 제작에만 700만 달러가 투입돼 기네스를 기록하기도 했다. 수록곡 도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며 싱글 음반만 100만 장이 판매되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앨범의 월드투어가 개최되었고
이후 1300만 장이 판매된 (2001)까지 총 10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마이클 잭슨은 솔로 통산 7억 5000만 장의 앨범판매량을 기록, 13개의 싱글 음반을 빌보드차트 1위에 올리는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19개의 그래미상을 비롯해 빌보드 어워드 40회, 아메리칸뮤직 어워드 22회, MTV 비디오뮤직 어워드 13회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고, 13개 부문의 기네스 월드레코드 보유자이기도 하다. 메이저 음악상에서 총 197개의 트로피를 가져간 셈이다. 그는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성형수술 및 아동 성추행 의혹 등 사생활을 둘러싼 논란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아왔다. 활동 초기에만 해도 흑인의 검은 피부였던 마이클 잭슨은 멜라닌 색소가 파괴되는 희귀질병인 '백반증'으로 인해 백색 반점이 피부를 뒤덮기 시작했고, 1984년 펩시콜라 광고촬영장의 화재로 머리에 화상을 입으면서 증세가 악화돼 결국 온몸이 하얗게 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타블로이드지의 가십거리로 악용되며, 백인이 되기 위해 박피수술을 받았다는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1988년 캘리포니아 주에 건립한 자신의 대저택 '네버랜드'에서 1993년에 13세 소년을 성추문한 혐의로 피소되었다. 잭슨은 혐의를 부인했고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1995년 소년의 부모는 법정 외 합의금으로 22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훗날 소년의 아버지가 꾸민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2003년에도 사기전과 범죄자가 자신의 아들을 성추행했다며 잭슨을 고소했으나, 마찬가지로 무혐의 판결이 내려졌다.
(아버지가 돈을 뜯어내기 위해 딸에게 시킨짓이라고하더라고요...-_-)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Lisa Marie Presley)와 1994년 결혼하여 19개월간 결혼생활을 지속하다 이혼했으며, 1996년 간호사인 데비 로우(Debbie Rowe)와 재혼하여 아들 프린스 마이클 주니어(Prince Michael Jackson Jr.)와 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Paris-Michael Katherine)을 낳았으나 1999년 이혼했다. 2002년에는 대리모를 통해 인공수정으로 셋째 프린스 마이클 2세(Prince Michael Ⅱ)가 태어났습니다.
한편 2009년 7월부터 영국 런던에서 앨범 발매공연이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저택에서 급성 프로포폴 중독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인(死因)은 잭슨의 주치의 콘레드 머레이(Conrad Murray)가 수면마취제인 프로포폴을 치사량 주입했기 때문으로 드러났다. 그의 사후에 2010년 제52회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을 수여받았으며, 잭슨의 자녀들이 대리 수상하였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모타운에서 4편의 정규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이 시절 솔로로서 <갓 투 비 데어(Got To Be There)>(1971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4위), 미국 가수 바비 데이(Bobby Day)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로킹 로빈(Rockin' Robin)>(1972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2위), 필 칼슨(Phil Karlson) 감독의 1972년 영화 《벤(Ben)》의 주제곡으로 쓰인 <벤(Ben)>(1972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다.
시드니 루멧(Sidney Lumet) 감독의 1978년 영화 《마법사(The Wiz)》에 출연하면서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담당한 프로듀서 퀸시 존스(Quincy Jones)와 만났다. 이를 계기로 마이클 잭슨의 솔로 앨범 《오프 더 월》(1979), 《스릴러》(1982), 《배드》(1987)에 퀸시 존스가 프로듀서로 참여하게 됐다. 《오프 더 월》은 1980년과 1981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페이버릿 앨범 (소울/알앤비)(Favorite Album (Soul/R&B))’을, 《스릴러》는 1984년에 열린 제26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 등을 수상했으며, 《배드》는 빌보드 싱글차트 1위 싱글 5편을 배출했다. 이처럼 이 3장의 앨범은 많은 매체로부터 호평을 들었으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절 마이클 잭슨은 솔로로서 <록 위드 유(Rock With You)>(1980), <빌리 진(Billie Jean)>(1983), <아이 저스트 캔트 스톱 러빙 유(I Just Can't Stop Loving You)>(1987) 등 다수의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 노래를 배출했다. 마이클 잭슨은 잭슨스의 1984년 앨범 《빅토리(Victory)》를 마지막으로 그룹 활동을 중단하였고
1991년 앨범 《데인저러스(Dangerous)》부터는 퀸시 존스와 파트너 관계를 맺는 대신 자신이 앨범을 총감독하며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다른 프로듀서들과 협업해 음반을 제작했다. 이 시기에 <리멤버 더 타임(Remember The Time)>(1992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3위), <유 아 낫 얼론(You Are Not Alone)>(1995년 1위), <유 록 마이 월드(You Rock My World)>(2001년 10위) 등의 노래를 히트시키며,
이후 컴필레이션 앨범을 통해 <원 모어 찬스(One More Chance)>(2003), <치터(Cheater)>(2004) 등 신곡 및 미공개 음원 몇 편을 공개했다. 그러나 2009년 7월부터 영국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콘서트 '디스 이즈 잇(This Is It)'을 앞두고 2009년 6월 미국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해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Michael Jackson's This Is It)》이 개봉되고
마이클 잭슨은 에픽 레코즈로 이적한 후 연이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킹 오브 팝’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딸꾹질을 하는 것 같은 특유의 보컬도 유명하다. 디스코, 펑크(funk), 뉴 잭 스윙, 어덜트 컨템퍼러리, 록, 오페라의 요소를 가미한 음악 등 다양한 형식의 노래를 선보였다. 1997년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2001년 솔로 가수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헌액됐고, 1999년 잭슨 파이브로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Vocal Group Hall Of Fame)에, 2002년 송라이터스 명예의 전당(Songwriters Hall Of Fame)에 헌액됐다. 1992년 자선단체 힐 더 월드 파운데이션(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해 생활고를 겪는 아이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뮤직비디오와 무대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파핑(popping), 로킹(locking), 로봇(robot) 등 펑크 스타일(funk styles)에 기반을 둔 춤을 주로 췄다. 양발을 이용해 미끄러지듯 뒤로 이동하는 ‘문워크(moonwalk)’는 그의 대표적인 춤으로 자리했다. <스무드 크리미널(Smooth Criminal)>(1988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7위)의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였던 것처럼 바닥에 발을 고정한 채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안티 그래비티 린(anti-gravity lean)’ 동작도 유명하다. 그러나 1993년과 2005년에 소년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했고, 재판을 통해 각각 무혐의 판결을 받으면서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기도 하였스며,
한편 1978년 영화 《마법사》에 출연하며 배우 활동을 하기도 했다. 제리 크레이머(Jerry Kramer), 콜린 칠버스(Colin Chilvers) 등이 감독한 1988년 영화 《문워커》가 그가 출연한 대표영화로 꼽힌다. 그러나 자신이 제작한 영화 외에는 대체로 단역을 맡았고, 연기에 대해서 특별한 평을 듣지 못했다. 자신의 노래 <잼(Jam)>(1992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26위)과 <블러드 온 더 댄스 플로어(Blood On The Dance Floor)>(1997) 등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기도 했다.
솔로 대표앨범으로 《오프 더 월》(1979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3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기록한 《스릴러》(1983), 《배드》(1987), 《데인저러스》(1991) 등이 있다. 솔로 대표곡으로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기록한 <돈트 스톱 틸 유 겟 이너프(Don't Stop 'Til You Get Enough)>(1979), <비트 잇(Beat It)>(1983), <더 웨이 유 메이크 미 필(The Way You Make Me Feel)>(1987), <맨 인 더 미러(Man In The Mirror)>(1988), <블랙 오어 화이트(Black Or White)>(1991) 등이 있습니다..

아래 목록은 마이클 의 앨범 목록입니다.
[디스코그래피: 스튜디오 앨범]
1971년 《갓 투 비 데어(Got To Be There)》
1972년 《벤(Ben)》
1973년 《뮤직 앤드 미(Music & Me)》
1975년 《포에버, 마이클(Forever, Michael)》
1979년 《오프 더 월(Off The Wall)》
1982년 《스릴러(Thriller)》
1987년 《배드(Bad)》
1991년 《데인저러스(Dangerous)》
1995년 《히스토리: 패스트, 프레젠트 앤드 퓨처, 북 원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
2001년 《인빈서블(Invincible)》

2015년 8월 30일 일요일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2 / 9월 11일 시작~!!!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2!!
 
시즌 1보다는 더 유명한 아이돌 가수들도 나오고
 
실력있는 랩퍼들도 많이 나오는듯 하네여~~
 
개인적으로는 유빈이랑 길미가 잘했으면 하는 마음...
 
캐스퍼는 이뻐서 봐줌..ㅎㅎ
 
자 그럼 이제부터 큰 이슈를 불러오는 언랩 시즌 2
 
출연진을 알아보도록 할게요~

 
유빈
소속 그룹 : 원더걸스
 
 

 
효린
 
소속그룹:시스타

 
길미

 
예지
 
소속그룹:피에스타
 

 
캐스퍼
(키썸의 절친이라는데 외모는 갠차는데 랩실력은 과연?

 
키디비

 
안수민
(쇼미더머니4에 출연해서 블랙넛을 홀린 여자로 유명함;;)

 
헤이즈

 
애쉬비

 
트루디

 
문수아
 
국내 최초 여자 래퍼 서바이벌인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2!!
 
과연 ~~ 어떨지 매우 기대가 되네요^^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1 멤버 프로필

 
얼마전 막을 내린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1 멤버들의 프로필입니다.
 
이제 곧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2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큰 기대가 되는 가운데 어떤 이슈를 몰고 올지 궁금하네요~ㅎㅎ